2025 겨울 오마카세: 형식에 압도된 개념
소개
2025년 푸른 뱀의 해가 밝았습니다. 이번 코스에서는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새롭게 소개하기보다는 이공계의 역사 속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수식의 형태, 다시 말해 형식 자체가 직관을 삼킨 여러 예시를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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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터
여러분이 가장 먼저 접한 벡터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데카르트의 직교좌표계 이후 기하학과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학자들은 여러개의 수를 동시에 다룰 필요성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수를 나열한 벡터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추상대수가 발달하게 되자 벡터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벡터가 단지 수를 나열한 것이라면, 그 형태가 직사각형일 뿐인 행렬을 벡터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편 그러한 이유로 행렬도 벡터라 할 수 있다면, 각 항별로 계수를 따로 다루는 다항함수도 벡터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벡터라는 것은 단순히 수를 나열했느냐의 여부가 아닌, 우리가 벡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성질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벡터인 것입니다. 이에 따라 현대 수학에서는 벡터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집합의 원소들이 특정 조건들을 만족하면 그 집합을 벡터공간으로 먼저 정의한 뒤 그 원소를 벡터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벡터란 수를 나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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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터공간의 원소가 벡터다"
각도와 삼각함수
초등학교에서 각이란 두 직선이 한 점에서 만나는 도형이고, 각도란 그 크기로써 정의됩니다. 중학교에서 삼각비는 직각삼각형의 한 각에서 빗변과 밑변, 높이의 비로써 정의됩니다. 고등학교에서 삼각함수는 주어진 각도 에 대한 삼각비의 대응으로써 정의됩니다. 이러한 빌드업은 기하적으로 대단히 상식적이고 깔끔하지만, 평면을 벗어나 다차원공간 에서 다루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적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이 두 벡터 의 각도 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제 각도라는 것은 직선이나 각과 같은 기하적인 개념 없이도 위와 같이 형식적으로 수식을 만족시키는 값으로써 정의된 것입니다.
"각도에 따라 삼각함수의 값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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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함수의 값에 따라 각도가 정해진다"
분산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통계학을 접할 때, 표본분산 를 위와 같이 계산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으로 나누는 건 그렇다 쳐도, 굳이 뺄셈을 해서 제곱을 취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의 눈으로 봤을 때, 을 분산이라 부르고 굳이 를 표준편차로 부르는 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어를 지어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최소제곱법 등의 컨셉이 익숙해지면서 이것이 자연스러운 정의임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훨씬 더 큰 맥락에서 내려다 봤을 때, 분산이란 데이터가 평균에서 얼마나 떨어져있는지를 잰 것이 아니라, 분산을 최소화하는 것을 평균으로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평균과의 편차제곱의 평균을 분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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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차제곱합의 최소값이 분산이고 분산을 최소화하는 것이 평균이다"
미분
교과과정에서 미분은 순간변화율이나 곡선의 기울기와 같은 응용으로써 접하게 되고, 미분계수는 연속함수에서 극한으로써 정의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형식은 해석학을 넘어 수학 전반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됩니다. 심지어 정수론에서는 과 같이 미분을 정의하는데, 극한의 개념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위의 형식을 갖춰냅니다. 한편 이원수의 응용으로써 자동미분이 연구된 것도 형식 그 자체로 얻은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함수의 평균변화량에 극한을 취한 것이 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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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미분법과 곱의 미분법을 가지면 미분이다"